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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울지기 맑은마루 2020. 1. 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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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선생은 장학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어느 날, 교감 선생님께서 저를 두고 하신 말입니다. 학교에서 정책이나 연구 쪽에 관심이 많고 항상 꼼꼼한 성격으로 정평이 나 있어, 사실 교감 선생님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몇 어절이 빠져 있습니다.     

 

  “유 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장학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물론 교감 선생님께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라는 전제가 깔리면서 위의 문장은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에 관해 많은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먼저 장학사라는 직책은, 앞서 말했듯이 업무에 있어 빈틈이 없이 꼼꼼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 성격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과제를 점검할 때에도 끝까지 하지 않는 어린이들은 끝까지 하도록 다그치며, 학생들의 행동에 조금의 어긋남이 있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수정하도록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잔소리의 강도는 약하다가 점점 강해져 언성이 올라가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엄하다.’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학생이 옴짝달싹 못 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같은 학교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선생님인 저와 학생들 사이에 가지는 교감이 긍정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마치 루소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10년이라는 교직 생활을 지내니 어느덧 ‘로봇’처럼 학생들을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초임 교사 시절에는 가르치는 입장에 적응하랴, 또 (교과의 내용이 아닌 학교의 환경, 가르치는 것의 다른 의미를) 배우고 가르치느라 혼란스러웠지만, 그 가운데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어떻게 학생들을 대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정립해 나가는 시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고민이 학교의 다른 일들에 파묻혀 다시 재상정되고 성찰과 사색이 더뎌지는 (혹은 멈춰지는) 순간, 저는 학생들을 기계적으로 대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의 사태로부터 초연한 국외자적 자세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적 고정관념(이홍우, 유한구, 장성모, 2003)”을 체감하는 겁니다.      

 

  선생님은 착하세요.”     

 

  그런데 막상,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은 한결같이 “선생님이 무섭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요? 저도 제가 너무 고성을 지르는 게 아닌가 걱정할 때가 많은데, 학생들은 저를 그저 웃긴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에게는 “선생님은 착하세요.”라고 말합니다. 6학년 학생들도 그랬고, 잘 모를 것 같은 2학년 학생들에게도 2년째 똑같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이 녀석들이 선생님을 무시하나?’라고 ‘자기집착(?)’이 잠깐 스칩니다만, 저는 이 학생들이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 13살인 어린이는, 심지어 아직 9살인 어린이들은 왜 저에게 ‘착하다’고 했을까요? 루소는, 인간은 “타고난 선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주변 세계를 접하지 않고 다양한 쾌락이나 악한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인간 그 자체는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주변세계에 물들지 않은 상대적으로 ‘선한’ 어린이들이 저를 보고 선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여러 선과 악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구별하고, 구별한 자신들의 인지(정념)을 바탕으로 저를 ‘선하다’고 판단한 것일까요?       

 

  루소는, 소년기의 교육은 소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애와 자기집착이라는 욕망(정념)을 막기 위해서 격리하고 유예해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자기 욕망이 타인을 조종하지 않으려면 인간관계를 유예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서로 불행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에 관한 관찰과 성찰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루소가 원하는 이상적인 환경(격리)는 제가 처한,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저를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은 대부분 후자의 원리(방법)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 배려해야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아라.”, “너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등등의 질문과 당위를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물론, “~해야 한다.”라는 방법의 지도는 루소가 말한 ‘소극적 교육’과는 거리가 멉니다. ‘미덕이나 진리’가 아니라 ‘악덕이나 오류에서 보호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에 대한 것은 예방 교육(?)이라고 불리는 수업을 할 때고, 후자는 수업을 통해서 구현되기보다는 학교생활 속에서 잠재적으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선생님이 중재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에게 개입합니다. 저는 에밀이 있는 그대로의 선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영향을 막아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에 비추어 수많은 학생 사이에서의 갈등이 루소가 말한 소극적 교육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극적 교육을 포함하여, 루소가 에밀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자연에 대한 교육은 결국, 외부의 세계를 될 수 있으면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인간 스스로가 “자기보존”을 위한 기관, 감각에 대한 능력 등을 통해 온전한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걸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어른인 선생님을 보고 ‘선하다’고 하는 학생들은 아직 완전하지 않더라도, 루소가 말한 ‘타고난 천성’, 그리고 알게 모르게 체득한 인간이 인간에게 전승해 내려온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유산’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루소의 표현으로는 ‘시민’, 유교적인 표현으로는 ‘군자’라고 비출 수 있는 그러한 전승을 위한 교수 활동들이 학생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이 ‘착하다’라는 말로 표현된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과 더한 眞心     

 

  그렇지만 이홍우, 유한구, 장성모(2003)는 “학생에게는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교사는 모순을 저지르고, 지적으로 옳은 생각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그것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교사는 자기모순에 덧붙여 자기기만까지 저지른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학부모 상담 주간에 만나는 학부모님들은 제가 “학생들이 제가 엄하게 하고 무섭게 하니 집에서는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하지 않나요?”라고 걱정스레 물어보면, 학부모님들은 “아니요,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해요. 애들이 아직 어리더라도 어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심을 느끼더라고요. 선생님이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면서 오히려 선생님 편을 들더라고요.”라는 말을 합니다.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만큼 정석대로 하고자 하고 꼿꼿해서 보통 사람들이 다가가기에 어렵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이 지녀야 할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들이 그러한 행동을 몸소 보여주기에 이러한 말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교수자도 자기교육”을 해야 하고, 학생의 변화에 있어 선생님은 외따로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도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듯, 선생님이 말을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또는 나타내는 것)은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비추어 본다면, 저는 아직 ‘로봇’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녁만 되면 녹초가 되는 까닭은 업무가 많아서가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정성을 쏟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심이 통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학생들에게 겉으로는 다그치는 것으로 보여도, 그 진심이 학생에게 통한 것입니다. 학생들은 그것을 느끼고 있고, 저와 학생들은 유대감이 형성된 것입니다. 자찬이 된 것 같지만 잘못된 ‘자기애’ 또는 ‘자기집착’에 빠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그러한 진심은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발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닌 자기희생의 사랑, 즉 아가페적인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교사 자신이 지쳐 방황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사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 봅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교수 스타일은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은 여자이신데도 불구하고 성량이 높고, 학생들을 휘어잡으면서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사회 선생님은 복도에서 마주칠 때는 항상 지쳐 있는 모습이셨지만, 사회 수업을 하실 때는 누가 보더라도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대하셨고, 그 선생님이 담임인 반 학생들은 무언가 모르게 선생님과의 유대감이 똘똘 뭉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저 두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습을 알게 모르게 따라 하며 학생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언급하셨던 ‘물려주는 사람과 물려받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무엇을 물려주고 받는지를 배우는’ 정신과 얼,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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